요즘 서울시 지하철역 명칭 뒤에 괄호를 치고 병원 이름을 병기하는 곳이 꽤 있다. 정차할 때 안내 방송에도 그런 이름이 요란하게 등장하는 걸 보면 홍보효과가 있을 듯하다.

최근에야 이게 서울교통공사가 적자 극복 차원에서 2016년부터 유상으로 판매하는 것임을 알게 됐다. 입찰을 통해 보통 3년씩 계약한다는데 3년 동안의 사용료가 무려 1억원에서 3억원까지라고 하니 우리 병원같이 예산 빠듯한 공공기관은 엄두를 내기가 어렵다.

만약 지하철에 '원자력병원역'이란 명칭을 쓸 수 있다고 하면 그 위치는 당연히 7호선 공릉역이 될 테지만 거긴 '서울과학기술대'가 역명 괄호 속에 이미 떡하니 자리 잡고 있다. 이 케이스는 돈을 들인 것도 아닌 데다 유효기간도 없이 사실상 영구적인 듯하다.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약칭 서울과기대 역시 국립대학이라 홍보비가 넉넉할 리 없음에도 이런 행운을 누리는 건 순전히 때를 잘 만났기 때문이다.

이대역, 교대역, 서울대입구역 등등과 같이 지하철 운행 초창기에는 지명을 붙이기가 곤란할 경우, 예를 들어 한 동(洞)이 너무 넓어서 관내에 지하철역이 복수로 존재하거나 역위치가 여러 동의 경계에 있는 경우에는 지명 대신 대학교 같은 그 지역의 랜드마크를 역명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그러다 많은 대학이 우후죽순처럼 자기네 학교도 지하철역 이름으로 해달라 요청하자 제2기 서울 지하철(5호선에서 8호선까지)부터는 명확한 기준이 생겼다.

'역사(驛舍)가 학교 부지에 있거나 아주 인접했을 때만 학교명을 쓰고, 500m 이내로 재학생이 2000명 이상인 대학일 경우에 병기할 수 있다'

바로 이 규정 덕분에 재학생이 만 명을 훌쩍 넘는 서울과기대는 1996년 7호선 공릉역이 오픈될 때 그 당시의 교명을 넣어 '서울산업대입구역'을 공릉역에 병기하는 데 성공했고, 2010년 개교 100주년 기념으로 교명을 바꿨을 때 기득권을 인정받아 지하철역에 나란히 쓰는 이름도 함께 바꿀 수 있었다. 일단 일찌감치 뭐라도 병기된 지하철 역명은 최근 진행하고 있는 지하철 이름의 유상판매 대상에서 제외라고 한다.

공릉역의 병기 명칭에 내가 유독 집착하는 까닭은 그곳, 특별히 2번 출구가 우리 원자력병원을 향하는 관문이기 때문이다. 암 환자들이 희망을 향해 나아가는 곳, 공릉역 2번 출구. 거기에 원자력병원이 아니라 서울과기대 이름이 붙어 있는 게 내심 좀 불편해서 인터넷 지도 앱을 통해 공릉역에서 두 기관 정문까지 거리를 확인해 본 적이 있다. 서울과기대까지 851m, 원자력병원까지 972m. 서울과기대가 120m가량 가깝긴 하지만 옛날 규정인 500m는 훌쩍 넘지 않는가!

지하철역 이름을 선점당한 게 아쉽지만 사실 우리 병원 식구들이 평소 적잖이 서울과기대 신세를 지고 있기에 500m 기준을 위반한 걸 자꾸 떠들고 싶지는 않다.

달랑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쪽문까지 열려 있어서 우리 직원들은 자주 가성비 좋은 그곳 학생 식당을 이용하고, 우리 주차타워 공사를 할 때는 몇 달씩 거기 주차장을 임차해 사용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자유분방한 대학 캠퍼스의 분위기가 느껴져 잠깐이나마 그곳에 다녀오면 훅 젊어지는 듯한 기분이 상쾌하다.

정작 내가 이 대학교를 좋아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동병상련이라고나 할까, 서울과기대도 우리 병원처럼 학교 곳곳에 '올드'한 분위기, 좋게 말하면 '클래식'한 정서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여러 차례 이름은 바뀌었지만 대한제국 시절인 1910년 지금의 효제동인 종로구 어의동에 '공립어의동 실업보습학교'로 시작된 것을 시초로 삼고 있으니 그 역사가 무려 115년이나 되는 학교다. 공릉동으로 이사 온 게 1980년이지만(우리는 1984년 공릉동 이전) 현 캠퍼스가 그때까지 서울 공대로 사용됐기에 도처에서 문화재 같고, 골동품 같은 건축물이 눈에 띈다.

젊은 나이에 위암으로 세상을 떠난 여배우 장진영을 실물로 처음 본 게 과기대 옛 건물인 '대륙관' 앞이었다. 서울산업대 시절이었던 2007년, 드라마 '로비스트' 촬영 현장을 우연히 점심 먹고 들어오다 목격했던 것이다. 우리 병원도 예전에 60.70년대 풍경이 필요한 영화를 찍을 때 가끔 장소 섭외가 왔었는데(그럴 때마다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서울과기대 또한 비슷한 형편이었나 보다.

서울과기대의 상징과도 같은 또 다른 건물로 '다산관'이 있다. 원래 중앙 높은 첨탑 위에 큰 시계가 올라가 있었는데 어느 순간 사라져 버렸다. 오래돼 시간이 자꾸 틀리고 또 유지비가 너무 많이 들었기 때문이라는 후문이다. 원자력병원 본관 건물 중앙에도 비슷한 크기의 커다란 사각형 아날로그 시계가 있었다. 2019년 한반도를 강타한 태풍 '링링'에 일격을 당해 박살이 났는데 새로 구입하자니 너무 비싸서 병원이 포기해 버렸다. 시차는 있지만 신기하게 닮은꼴인 두 기관이다.

설립된 지 오래됐으나 '낡은' 기관이 되지 않도록 부단히 노력하는 점도 우리와 서울과기대가 닮았다. 역사와 전통을 바탕으로 최근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는 서울과기대를 보면서 원자력병원도 큰 자극을 받는다. 서로의 성장을 견인할 수 있는 좋은 이웃, 좋은 친구라는 데 생각을 같이하면서 의기투합한 공릉동의 두 기관은 올해부터 '의과학대학원'을 개설했다. 방사선바이오와 공학이 만난 명실상부한 융합교육이 지금 한창 진행 중이다.

'그 사람을 잘 모르겠거든 그 친구를 보라'는 문장이 사마천의 '사기'에 나온다. 비슷한 말이 돈키호테에도 나오고 이솝우화에도 나오고 성경 잠언 13장에도 나온다. 우리와 서울과기대가 비록 의료기관, 교육기관으로서 각각 주된 사명은 다르지만 경쟁과 협력 속에 앞으로 줄곧 서로에게 자랑스러운 친구가 되기를 소망한다.

물론 이달 말 예정인 두 기관의 탁구 시합에서는 우리가 이길 걸로 예상하지만 말이다(지하철역 이름을 타이틀로 걸면 좋으련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