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신문·일간보사=차원준 기자]전남대학교 의과대학 박인규 교수와 중앙대학교 융합공학부 박한수 교수 공동 연구팀이 인공지능(AI)을 활용해 기존 항암제의 한계를 한 번에 뛰어넘는 나노전달체를 만들었다. 이 연구 결과는 난생처음으로 AI가 약물 조합부터 표적 분자 발굴, 나노입자 설계까지 전 과정을 주도해 완성한 사례로, 국제 학술지 'Journal of Nanobiotechnology'(IF 12.6)에 최근 게재됐다.

연구팀이 개발한 나노캐리어는 안과 밖이 다른 '핵-껍질(core-shell)' 구조를 띤다. 안쪽의 메조포러스 실리카 코어에는 천연 유래 항암 물질인 베르베린을, 바깥쪽 리포솜 껍질에는 기존 강력 항암제 파클리탁셀을 각각 담았다. 입자 표면에는 AI가 수만 개 후보 중에서 골라낸 CXCR4 표적 펩타이드가 촘촘히 붙어 있어, 암세포가 특히 많이 내놓는 CXCR4 수용체를 정확히 인식한다. CXCR4는 암의 전이와 재발을 주도하는 핵심 열쇠로 알려져 있다.

지금까지 약물을 둘 이상 섞어 쓸 때는 연구자들이 문헌과 경험에 의존해 시행착오를 반복했다. 이번에는 달랐다. 연구팀은 세 단계로 이어지는 AI 워크플로우를 설계했다. 먼저 수천 가지 약물 조합 중 시너지 효과가 가장 강한 베르베린-파클리탁셀 쌍을 예측하고, 이어 CXCR4에 가장 잘 붙는 펩타이드 서열을 찾아내며, 마지막으로 약물이 새지 않고 서서히 방출되도록 나노입자 크기·구조를 최적화했다. 사람이 수년 걸릴 작업을 몇 주 만에 끝낸 셈이다.

실험실에서 이 나노캐리어를 대장암 세포에 처리하자, 암세포 증식과 이동이 단일 약물보다 훨씬 강하게 억제됐다. 생쥐에 이식한 대장암 모델에서는 투여 3주 만에 종양 크기가 80% 이상 줄었고, 암 때문에 커진 비장도 정상 크기로 돌아왔다. 무엇보다 혈액검사와 체중 변화에서 전신 독성이 거의 나타나지 않아 안전성까지 확인했다.

박인규 교수는 "이제껏 약물 조합은 운에 가까웠다면, 이번엔 AI가 과학적으로 '최적'을 계산해줬다"며 "CXCR4는 유방암, 췌장암, 전립선암 등 침습성이 강한 암에서 공통으로 과발현되기 때문에, 이번 플랫폼을 조금만 수정하면 여러 암종에 바로 적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연구팀은 앞으로 환자마다 다른 CXCR4 발현량과 약물 반응을 실시간으로 분석해 그날그날 맞춤 나노약을 제조하는 시스템까지 구상하고 있다. AI와 나노기술이 손잡은 이 새로운 접근은 머지않아 '모든 환자에게 딱 맞는 항암제'라는 오랜 꿈을 현실로 바꿀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