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성욱 딜로이트 컨설팅 파트너(부사장)

[의학신문·일간보사]1. 서론: '사후 치료(Cure)'에서 '사전 관리(Care)'의 시대로

글로벌 헬스케어 시장은 빅테크, 보험사, 병원이 서로의 경계를 허무는 '융합의 시대'로 빠르게 진입하고 있다. 그 중심에는 건강검진 정보, 진료데이터, 디지털 건강정보 등 대규모 건강데이터를 축으로 한 '예방의학'과 '질병예측' 비즈니스가 자리 잡고 있다.국내 역시 의료 마이데이터 시행, 건강정보 고속도로(My Healthway)구축, 실손24 보험청구 전산화 등 의료 데이터 생태계가 본격적으로 열리고 있으며, 정부의 데이터 개방 및 AI 활용 정책이 추진되면서 글로벌 의료 혁신 흐름에 나란히 합류하고 있다.

의료 마이데이터의 시행은 그 동안 병원의 폐쇄적인 서버 속에 갇혀 있던 개인의 건강 기록이 환자의 주권 하에 세상 밖으로 흐르게 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정보 이동의 자유를 넘어, 의료의 패러다임이 질병 발생 후 대응하는 '사후 치료(Cure)'에서 데이터 기반의 '사전 예방 및 예측(Prevention &Prediction)'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그 동안 병원은 아픈 사람이 찾아오면 진단하고 처방하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디지털 IT 기술과 AI의 발전, 그리고 데이터의 개방은 병원의 정의를 확대하고 있다. 이제 헬스케어는 물리적 공간을 넘어, 금융(보험)과 결합하고 일상의 데이터와 융합하며 인간의 삶 전반을 능동적으로 케어하는 산업 생태계로 진화하고 있다. 이 거대한 변화속에서 글로벌 빅테크와 병원, 보험사는 어떻게 융합하고 있으며, 이 기술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조망하고자 한다.

2. 글로벌 트렌드: 경계를 허무는 '빅블러(Big Blur)'와 병원의 플랫폼화

해외에서는 이미 수년 전부터 병원(Provider)과 보험사(Payer), 그리고 빅테크 기업 간의 경계가 무너지는 '빅블러(Big Blur)'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들은 방대한 데이터를 무기로 헬스케어 비즈니스의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첫째, 병원 스스로가 데이터 플랫폼이자 기술 기업으로 변모하고 있다. 미국의 메이요 클리닉(Mayo Clinic)과 클리블랜드 클리닉(Cleveland Clinic) 등은 건강검진·진료·웨어러블·생활습관 데이터를 AI로 통합 분석하여 만성질환 위험군을 조기 선별한다. 특히 메이요 클리닉은 데이터를 외부와 연결하여 예방 중심의 진료-예측-보험-관리 원스톱 서비스를 제공하는 등 데이터 융합을 통한 전주기 혁신을 실현하고 있다. 병원이 단순한 진료 수익을 넘어 데이터 자산화를 통해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있다.

둘째, 빅테크와 보험사가 의료의 최전선에 진입하고 있다. 2026년 애플, 구글, 삼성헬스, 아마존과 같은 빅테크 기업들은 웨어러블 기기를 통해 축적된 심박수, 수면 패턴 등 일상 데이터를 AI로 분석하여 맞춤형 건강관리 서비스 고도화를 준비 중에 있다. 보험사들 역시 전통적인 통계 기반 상품에서 벗어나, 가입자의 실시간 건강 데이터를 활용하는 '다이나믹 프라이싱(Dynamic Pricing)' 모델을 도입하였다. 오스카 헬스(Oscar Health)와 클리블랜드 클리닉의 합작 보험 플랜처럼, 병원과 보험사가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결합해 질병을 예방하고 보험료를 할인해 주는 모델이 핵심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3. 국내의 대전환: '실손24'와 '마이데이터'가 가속화하는 데이터 고속도로

국내 역시 이러한 글로벌 흐름에 맞춰 대응 중에 있다. 2025년은 국내 헬스케어 데이터 인프라 구축의 '원년'이라 할 수 있다.가장 주목할 만한 변화는 보험개발원의 '실손24' 시스템이다. 이 시스템은 중계기관을 통해 핵심정보인 환자의 진료비 세부내역 그리고 처방 정보, 영수증 데이터가 보험사로 디지털 전송되는 구조를 실현하였다. 이는 표면적으로는 소비자의 청구 편의성을 극대화한 것이지만, 산업적으로는 '의료기관의 데이터와 금융기관의 시스템이 표준화된 고속도로를 통해 연결되기 시작했다'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병원과보험사간 데이터가 전송 및 공유의 표준화된 파이프라인이 구축된 것이다.

여기에 2025년 3월 시행된 의료 마이데이터 제도는 이 흐름을 더욱 가속화할 것이다. 현재 상급종합병원 47곳을 포함한 1,263개 의료기관이 '건강정보 고속도로'에 실시간 연동되어, 환자는 자신의 진료기록과 검진 정보를 통합 조회하고 원하는 곳으로 전송할 수 있게 되었다. 정부는 현재 모든 상급종합병원의 진료기록을 통합 조회할 수 있도록 하고, 개인정보 보호법과 의료법을 정비하여 데이터 전송·결합·활용의 기준을 명확히 하였다. 바야흐로 국내에서도 헬스케어 데이터가 비즈니스의 중심이 되는 시대가 도래 한 것이다.

미국의 경우, 우리의 의료 마이데이터와 유사한 TEFCA(Trusted Exchange Framework and Common Agreement)의 'IAS(Individual Access Services)'가 2023년 12월에 가동되었으며, 실제 시행시점은 우리와 차이가 없다. 일본은 한국의 헬스케어 서비스 상황을 참고 및 예의주시하고 있다.

과거 우리는 선진국의 사례를 참고하는 '빠른 추격자(Fast Follower)'였지만, 헬스케어 서비스 분야는 미국, 일본, 한국이 동일한 출발선상에 서 있다. 오히려 전 국민 대상의 의료데이터 통합 인프라 측면에서는 한국이 이들보다 한발 앞서 있다. 이는 데이터 헬스케어 분야에서는 글로벌 시장을 선도하는 '최초 선도자(First Mover)'가 될 수 있는 기회임을 시사한다.

4. 데이터가 여는 의학의 미래: 통계를 넘어선 '초개인화 의료'

데이터 융합이 가져올 의학적 효용은 명확하다. 바로 '질병 예측 및 예방 의학의 고도화'이다. 기존의 의학이 '평균적인 인간'을 대상으로 한 통계적 접근이었다면, 데이터 중심의 의학은 '나'라는 고유한 개인에게 최적화된 초개인화 의료/서비스 (Hyper-personalized Medicine/Care)이다. AI와 빅데이터 기술은 진료·검진 데이터, 라이프로그, 유전체 정보를 통합 분석하여 질병 예측의 핵심 도구로 부상하였다. 실제로 국내 한 바이오 벤처(UBIRIS)는 홍채 사진 1장으로 1분 만에 143개 질환의 위험도를 예측하는 AI 솔루션을 선보였으며, 국내외 병원에서도 낙상·치매·심혈관질환 예측 솔루션이 활발히 실증되고 있다.이러한 기술은 병원과 보험사의 비즈니스 모델도 변화시켰다. 병원은 보험사와 협력하여 고위험군 환자에게 선제적인 건강관리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성공 시 인센티브를 받는 새로운 수익 모델을 창출하고 있다. 질병이 발생한 후(Post-event)에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발병 전(Pre-event)에 개입하여 리스크를 선제적으로 관리하고 최소화 하는 것, 이것이 빅테크와 의료계가 지향하는 예방 의학의 미래다.

5. 기술의 철학: 디지털 IT 및 AI 발전은 결국 '인간'으로 수렴

우리는 흔히 AI, 빅데이터, 자동화 시스템을 차갑고 기계적인 것으로 인식한다. 하지만 AI 에이전트의 등장과 함께, 의료와 헬스케어 분야에서 벌어지고 있는 IT 혁신의 방향성은 그 어느 때보다 '인간 지향적(Human-Centric)'이다. '실손24'를 통해 서류제출 및 청구과정을 간소화한 사례나 병원과 정부 그리고 보험사가 의료 데이터를 공유해 질병 예측, 사전알람 및 헬스케어 서비스 등이 IT 기술로 인간이 겪을 고통과 경제적 파탄을 사전 예방하는 사례이다. 또한 AI가 방대한 데이터를 분석해 의사의 진단을 보조함에 따라, 의사는 기계적인 업무에서 벗어나 환자와 교감하는 '건강수명 코치'라는 본질적 역할에 더욱 집중할 수 있게 된다.

결국 헬스케어 비즈니스의 데이터 활용은 상업적 이익 추구를 넘어, 인간 존엄성을 지키고 삶의 질(Quality of Life)을 높이는 방향으로 수렴하고 있다. 기술은 도구일 뿐, 그 목적지는 언제나 사람이다.

6. 결론: 새롭게 열리고 있는 생태계를 위한 제언

데이터 중심의 헬스케어 시대가 이미 시작되었으며, 의료 마이데이터, 실손 청구 시스템, AI 에이전트 등으로 대표되는 변화는 앞으로도 더욱 가속화될 것이다.

이 새로운 생태계가 글로벌 수준의 'K-의료/헬스케어'로 성공적으로 안착하기 위해서는 각 주체의 역할 변화가 요구된다. 병원은 데이터를 단순히 보관하는 창고가 아니라, 가치를 창출하고 공유하는 '오픈 플랫폼'으로 거듭나야 한다. 기업(빅테크/보험사)은 데이터의 주인이 결국 '환자(인간)'임을 명심하고, 철저한 보안과 신뢰를 바탕으로 한 상생 모델을 구축해야 한다. 특히 정부는 데이터가 안전하게 흐를 수 있도록 규제와 혁신의 균형점을 지속적으로 조율하고, 마이데이터 인프라를 고도화해야 한다.특히, 국내 초개인화 서비스가 글로벌 시장을 선도하기 위해서는 다음 4대 핵심 데이터를 통합관리하고 활용할 수 있는 기반구축이 필요하다.

●개인의료 마이데이터: 진료기록, 건강검진 결과, 약국처방전, 웨어러블 데이터

●심사평가원 빅데이터: 질병별 진료통계, 평균의료비, 의료이용패턴, 예후데이터

●보험사 데이터: 보장(담보)별 보험료, 청구 및 지급이력

●신용정보원 보험신용정보: 보험계약정보, 보장상세정보, 지급이력

AI로 대변되는 디지털 기술과 의학의 만남, 그리고 데이터의 자유로운 흐름은 인간을 더 건강하고, 더 안전하며, 더 인간다운 삶으로 안내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지금 '데이터 중심의 헬스케어'를 주목해야 하는 진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