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신문·일간보사=김영주 기자]보험급여 의약품의 경우 정부 재원이 투입되는 만큼 기업과 정부간 가격을 둘러싼 줄다리기가 치열하게 전개되기 일쑤이다. 정부는 어떻게든 깎아서 재정절감을 하고자 하고, 제약기업은 적정가격을 유지해 외형과 이익을 지키려 한다. 보험의약품은 너무 많이 팔려도, 병의원에 저렴하게 들어가도 가격인하 요인이 된다. 물론 리베이트 등 불법행위에 노출되면 답이 없다. 기기묘묘한 인하 기전들이 선보인다. 기업 입장에서 정부는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아 가격을 낮추려고 혈안이 돼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재정 안정화의 명분 앞에 결국 한수 접히는 게 기업이다.

그러나 기업들이 도저히 납득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바로 '일괄약가인하' 이다. 묻지도, 따지지도 말라는 '막무가네 식' 이기 때문이다. 절차에 따라 가격을 받아 이미 처방되고 있는 '기등재의약품'에 대해 합당한 이유없이 가격을 후려치겠다는 것인데 누군들 납득하겠는가?

일괄약가인하는 제약 100년 역사에 딱 한번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13년 전인 2012년에 있었던 일이다. 이명박 정부 복지부는 기등재 보험의약품 9000 여품목을 대상으로 전체 매출의 14%에 해당하는 1조7000억원상당의 가격인하를 단행했다. '일괄약가인하'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한 지 1년 만에, 입안예고 된지 5개월 만에 전격적으로 이뤄졌다.

그동안 정부 방침에 대체적으로 순응하며 따라왔던 제약업계도 이번에는 가만 있지 않았다.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저항수단을 다 동원했다. 대국민서명운동을 통해 수십만명의 국민 서명을 받았고, 장충체육관에서 장외집회도 열었으며, 100여곳 이상 제약이 공동 참여하는 행정소송도 결의했다. 심지어 하루동안 공장 문을 닫고 의약품생산을 하지 말자는 극단적인 대책도 논의됐다.

특히 행정소송에 대해선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법률적 해석이 대세를 이뤘다. 법률전문가들은 소급입범에 의한 재산권 침해가 명백해 소송진행의 경우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조언했다.

그러나 당시 정부의 집요한 개별기업들에 대한 소송포기 압박, 협회 주도권을 둘러싼 상위기업과 중견기업간 내부 갈등 등이 겹치며 결국 단일대오가 무너져 '백기투항'으로 끝을 맺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참혹했다. 매년 두자릿수 성장을 이어오던 제약기업들의 매출성장이 0%대에 머물렀고, 영업이익·당기순이익 등 이익률은 마이너스 성장으로 곤두박질 쳤다. 제약기업들은 다국적사 오리지널 의약품 도입을 통한 판매로 외형을 유지하려안간힘을 쏟았고, 일부 기업들은 비급여 의약품에 집중해 그나마 버텨 나갔다. 토종 제약의 다국적기업 종속화에 대한 우려가 쏟아졌고, 비급여 의약품의 활성화로 결국 정부 보험재정 절감분의 상당부분을 소비자에게 떠넘기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낳았다.

그 일괄약가인하가 13년 만에 부활했다. 정부는 약가관리 합리화 방안이라는 이름아래 기등재 보험의약품에 대해 가격인하를 예고했다. 내년 시행에 들어가 이후 3~4년안에 총 4500여품목에 대해 1조원 상당의 가격을 인하 하겠다는 것이다.

정부 입장에서는 이번 방안이 2012년 일괄약가인하와는 다르다고 항변하고 싶어 하는 인상이다. 관련 발표 자료에 이번 방안이 일괄적·기계적 조정이 아니라고 굳이 부연해 놓고 있다. 아마 2012년 9000여 품목에 대해 1조7000억상당의 가격인하를 일시에 단행한 데 비해 이번엔 3~4년의 기간을 두고 단계적으로 진행하며 품목도 4500여개로 절반 수준이고, 금액도 1조 정도로 현재의 산업계 수준에 비해 그다지 무리하지 않은 정도라고 말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그러나 가격인하 이유를 '2012년 일괄약가인하 개편 이후에도 약가 조정없이 최초 산정가(53.55%) 수준에서 유지되고 있는 약제'라고 적시하고 있다. 기존 제도를 통한 가격인하 요인이 없어 유지된 가격일 터인데 가격이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인하하겠다는 것은 무슨 논리인가. 합리적 이유없이 한꺼번에,그것도새 제도를 기 등재의약품에 적용함으로써 소급입법에 의한 재산권 침해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 등에서 2012년과 데자뷰 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이번 기 등재의약품 가격인하 방안은재정안정화를 명분으로 저항이 쉽지 않은 기업들의 팔을 비트는 불공정한 정책이라는 비판을 벗어날 수 없을 듯 하다.